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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뽑은 올해의 맥주는요

2023.12.26


제가 뽑은 올해의 맥주는요


12월은 바야흐로 연말결산의 시즌이다. 그렇다면 맥덕(맥주 덕후)으로서 올해의 맥주를 꼽아볼까. 최고의 맥주를 가린다기보다(다른 모든 맥주를 서운하게 하는 단 하나의 맥주를 뽑을 수는 없는 일이다) 계절마다 ‘맥주와 함께한 순간’을 결산하는 일에 가깝겠다. 제철 맥주를 어떻게 즐겼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릇 제철의 감각을 누리며 맥주를 마시는 법.


글, 사진│김신지


봄에는 벚맥 *벚꽃 아래서 맥주


양평 어느 숲속에 좋아하는 에어비앤비 숙소가 하나 있다. 통나무로 지어진 산장인데 겨울에 벽난로를 쬐면서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본 후로 홀딱 반했다. 다른 계절의 풍경이 궁금해져서 돌아오는 길에 바로 봄의 며칠을 예약했다.

그렇게 4월에 다시 찾아간 곳. 서울엔 벚꽃이 다 진 후였는데 봄이 더디 오는 숲속이라 그런지 벚꽃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런 순간엔 봄을 두 번 겪는 행운을 누리는 것만 같다. 벚꽃뿐 아니라 촛대처럼 생긴 자목련과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라일락, 진분홍 개복숭아 꽃, 고광나무 하얀 꽃 등이 어우러져 정원을 색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외투를 껴입고 테라스 의자에 앉아서 ‘벚꽃 멍’을 하며 맥주를 마시자니 왜 옛 선비들이 이런 순간 시를 읊곤 했는지 이해가 됐다. 부족할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언어로 옮겨보고 싶어지는 순간.

벚꽃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란 뭐랄까… 내가 이런 호사를 다 누리는구나 싶어지는 맥주다. 계절은 우리에게 늘 아낌없이 주고 있구나 느끼게 하는 맥주이기도 하다. 봄에만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라면, 매년 잊지 않고 챙기는 것도 좋겠지. 벚꽃이 피어 있는 건 일주일 남짓, 봄에 우리가 더욱 부지런해져야 하는 이유다.


여름에는 야맥 *야외에서 즐기는 맥주


바람이 시원해지고 사람들의 옷이 얇아지면 가게마다 야외 테이블을 펼쳐놓기 시작한다. 빨간색,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을 탁탁 펼쳐서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는 초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다. 나에게 초여름은 마음에 쏙 드는 풍경을 가진 야외 테이블을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계절. 장마가 시작되고 모기가 늘어나기 전에 바깥 자리를 서둘러 누려야 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런 중요한 때에 (다른 계절에 앉아도 충분한) 실내에서 맥주를 마실 수야 없는 노릇. 올여름에도 부지런히 야외 테이블을 찾아 다녔다. 손님이 직접 따라 마시면 생맥주를 2천원 할인해주는 을지로 ‘수표교 호프’ 바깥 테이블에도 앉고, 무주산골영화제에 가서 등나무 운동장에 누워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기도 하고, 오래돼서 더 정겨운 동네 호프집에도 자주 갔었다.

야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서 마시는 맥주란 뭐랄까… 평소보다 호탕해진 기분이 들어서 좋다. 인생 뭐 있나, 마음 맞는 사람들이랑 바람 좋은 계절에 맥주잔 부딪치는 맛이지. 고민과 걱정과 불안은 생맥주 거품처럼 터져 사라지고, 그렇게 좀 더 단순하게 지금을 살게 해주어서 좋다. 다음 여름에는 또 어떤 야외 테이블을 만나게 될는지.


가을에는 단맥 *단풍놀이 하며 맥주

올가을의 맥주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연 경주에서 대릉원을 바라보며 마신 수제맥주다. 강연 차 경주에 간 김에, 가을의 경주를 실컷 걷다 오려고 2박 3일간 머물렀다.

곳곳에 단풍에 물든 나무들이 서 있는 대릉원을 걷고서 마지막 날 저녁에 찾아간 맥줏집 ‘ㅎㅎㅎ’. 바깥 쪽 자리에 앉으면 무려 ‘능’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노을에 시시각각 물들어가는 거대한 능과 총이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풍경이기도 했다.

오래된 누군가의 무덤을 바라보며 이런 정취를 누린다는 게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가, 아 이건 경주에서만 누릴 수 있는 제철 낭만이지 싶어 또 좋기도 했던 곳. 고즈넉한 가을밤에 경주만큼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앞으로도 가을 맥주 하면 어김없이 이 날의 풍경이 떠오를 것 같다.


겨울에는 캐맥 *캐럴 들으며 맥주


캐럴은 추위에 스산해진 마음을 데워주는 기능이 있어서, 겨울밤의 맥주에 곁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음악이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요즘 우리 집은 매일이 송년회다. 약속이 빼곡하다는 뜻은 아니고, 집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2인 가족 중 누군가 한 명이 술 마시고픈 마음이 들어버리면 “송년회 해야지” 하면서 함께 마셔주는 시즌이란 소리다.

양심적으로 그래도 ‘퐁당퐁당(하루를 마시면 하루는 거르는 일)’ 술을 마실 계획이었는데 하필 둘이다 보니 한 사람의 퐁과 다른 한 사람의 퐁이 계속 만나버려 퐁퐁퐁퐁의 날이 이어지고 있다. 12월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좀 봐줘도 될 것 같은 달이니까 별수 없이(?) 자체 송년회를 계속 여는 수밖에.

냉장고에서 ‘오늘의 맥주’를 꺼내고, 바로 옆에 있는 잔 진열장에서 ‘오늘의 잔’을 고른 후, 유튜브에서 ‘오늘의 플리(플레이리스트)’를 선곡하면 준비 끝. 어제도 분명 가볍게 마시자고 하고 시작한 거였는데….(이하 생략) 오늘 아침, 피곤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출근 준비를 하던 강이 문득 말했다.

“그래도 집에서 마시면 집에 안 가도 돼서 좋아.”

과연 겨울 맥주의 꽃말 같은 한 마디군. 올해가 보름이나 남았으니, 집에서 마셔 집에 안 가도 되는 날이 한동안 이어지겠지. 그러다 어느 날은 창 너머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모습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올해의 모든 순간이 좋았던 건 아니지만, 맥주와 함께했던 순간들은 모두 좋았다. 슬프고 괴로워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 언제나 조금 더 즐거워지려고 마시는 술이었기에.

그러니 맥주의 계절은 여름이라 오해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맥주의 제철은 사계절이라고. 새해엔 새로운 맥주와 함께 또 어떤 제철 행복을 누리게 될까. 오지 않은 시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오늘이 제철인 맥주를 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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