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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이 좋았다, 와인과 함께라서

2023.12.07


모든 날이 좋았다, 와인과 함께라서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머글과 덕후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머글은 ‘재미있었다, 좋았다’에서 끝이지만, 덕후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진정한 덕후들은 자신이 덕후임을 부정하기 마련이지만, 이 명제가 맞다는 전제하에 고백한다. 와인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덕후다. 나에게 와인은 ‘맛있었다’에서 끝이 아니라 그 순간부터 시작이기 때문이다.


글, 사진│신지민

나에게 공부란 ‘입시를 위해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취업하기 위해서’처럼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목적을 달성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재미도 없었다.


와인은 달랐다. 이 와인은 왜 맛있는지, 왜 이런 맛이 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와인 산지는 무엇이 다르고, 품종은 어떻게 다른지 공부하게끔 만들었다. 와인 공부는 하면 할수록 할 게 더 많았다. 시험 범위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재밌었다. 공부할 게 많아서 와인이 더 좋았다. 와인에 대한 나의 사랑은 깊어져만 갔고, 덕력은 한층 더 심화됐다. 찐 덕후가 되고 보니 어느새 신문에 2년 동안 와인 칼럼을 쓰고 있었고, 와인 에세이 《방법은 모르지만 돈을 많이 벌 예정》을 쓴 작가가 돼 있었다. 어쩌다 보니 와인전문 자격증과 소믈리에 자격증도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말 와인을 마시고 맛있어서, 좋아서 더 찾아보고 기록해 둔 것뿐인데 그렇게 되어있었다.


이쯤 되니 ‘성지 순례’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와인 덕후에게 성지란 어디일까. 당연히 와이너리와 포도밭이다.

이전에 스페인과 이탈리아 와이너리에 방문한 적이 있지만, 프랑스 와이너리는 경험이 없다. 프랑스 와인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프랑스에 꼭 가고 싶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하지만 프랑스는 다른 나라에 비해 와인업계 종사자가 아닌 일반인이 방문하기 어렵다고 들어왔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일단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공부하면 언젠가는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마음으로. 막상 프랑스어를 몇 달 공부하다 보니 밑도 끝도 없는 용기가 생겼다. 당장 프랑스에 가봐야겠다 싶었다. 샹파뉴, 부르고뉴, 보르도 와이너리 40곳 정도에 메일을 보냈다. 거절을 당하거나 아예 답장이 없는 경우도 있어서 한동안은 우울했다. 프랑스어는 왜 공부했나 싶기도 했다. 사실 영어로 해도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거기서 멈출 내가 아니지. 나는 조금 더 뻔뻔하고 간절하게 나를 어필하기로 했다. 와인 업계 종사자가 아니고 와인과 전혀 관련 없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내가 얼마나 와인을 사랑하는지 말이다. 어설픈 프랑스어로 정성스럽게 쓴 나의 진심이 통했다. 꽤 많은 와이너리에서 투어와 시음을 시켜주겠다고 답장이 왔다. 덕분에 올해 가을, 나는 한 달간 프랑스 와인 여행을 다녀왔다.

좋은 와인을 시음하고 아름다운 포도밭을 거닐었다. 모든 시간이 황홀했지만, 그럼에도 더욱 기억에 남는 순간은 오직 와인 덕분에 받을 수 있었던 따뜻한 마음들이다.


하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이자 평생의 꿈이었던 뫼르소meursault* 마을에 가는 날이었다. 그런데 실수로 뫼르소를 지나치고 다음 역에 내리고 말았다. 택시는커녕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고 다음 기차까지는 한참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많이 내리고 있었는데, 그때 저 멀리서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났다.

기차를 놓쳤냐고 묻더니 자신의 차로 태워주겠다 했다. 자신도 뫼르소를 좋아한다며 뫼르소 마을 투어까지 해주었다. 말은 잘 안 통했지만 한국에서 온 와인 덕후의 진심이 전해진걸까. 할머니와 헤어지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함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Merci beaucoup.”(메르시 보꾸)

*뫼르소(meursault): 부르고뉴 화이트 와인 산지 중 하나로, 샤도네이 품종으로 만든다. 뫼르소라는 이름 하나로 와인의 특징과 스타일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덕후들은 꼭 이런 식으로 말한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뫼르소로 정할 정도로, 나처럼 뫼르소를 좋아하던 나의 숙소 주인아주머니도 내게 큰 감동을 줬다. 숙소를 떠나던 날 아침, 아주머니는 내게 잠깐 시간을 내달라고 하더니 올빈(올드 빈티지) 뫼르소를 꺼내왔다. 전날 마셨는데,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남겨두었다며.

와인 덕후들에게 올빈이란 단순히 오래된 와인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가져다주는 숙성의 감동이 아니던가. 와인 자체도 너무 훌륭했지만, 좋은 걸 나누고 싶어 하는 진심에 감동해서 이번에도 역시나 또박또박 말했다. “Merci beaucoup.”(메르시 보꾸)


가끔은 무슨 취미를 이렇게까지 하나, 이렇게까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프랑스 와인 여행을 통해 나는 배웠다. 덕질의 핵심은 공부도, 지식도, 돈과 시간도 아니라는 것. 무언가를 좋아하는 진심은 국적과 언어와 나이를 초월해 어떻게든 통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덕질의 축복은 끝이 없으리라.

신지민: 10년 동안 신문 기자로 일했다. 〈한겨레〉에 ‘신지민의 찌질한 와인’을 연재했고 ‘띵 시리즈’ 에세이 와인편 〈방법은 모르지만 돈을 많이 벌 예정〉을 썼다.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먹부림’일 정도로 맛있는 음식에 진심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와인을 추천하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는 ENF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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