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ENT

러너의 오아시스

2023.10.26

러너의 오아시스


"이제 진짜 끝이야."

이른 새벽부터 웹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사를 읊는다. 근데 사실이긴 하다. 오늘이 진짜 마지막이다.


글, 사진 I 김상민

여기까지 보면 헤어지지 못하는 남자와 떠나가지 못하는 여자의 지독한 치정극 같지만 여러분의 도파민 가득한 기대를 충족시키진 못할 듯하다. 오늘은 여름부터 이어진 땀방울에 큰 마침표를 찍는 날. 4년 만에 참가하는 마라톤의 훈련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인 만큼 내용도 간단하다. 42.195km를 뛸 수 있단 걸 몸에 주입시키는 훈련으로, 여러분도 절반은 따라 할 수 있다. 지금 밖으로 나가 여유 있는 속도로 달려보자. 빠르다는 느낌이 들면 안 된다. 느리게 뛰고 있음을 인지하는 속도, 딱 그 정도면 된다. 이런 간단한 운동에 "훈련"이란 이름을 붙이는 게 의아하다면, 그건 아직 나머지 절반을 말하지 않아서다.


그렇게 35km를 달리시면 된다. 흔히 LSDLong Slow Distance라 부르는 전통의 마라톤 훈련법으로, 보통 대회 1~2주 전 행하는 마지막 점검이다. 쉽게 말해 이것만 마치면 대회 준비도 끝이다. 어마어마한 거리에 주눅 들면서도 희미하게 웃음 지은 이유다. 그렇게 마지막 훈련의 첫발을 뗀다.

여름 훈련의 효과일까? 10km 지점에서도 힘들다는 느낌이 없다. 첫 훈련에서 12km도 못 가 포기했던 걸 생각해 보면, 이런 지금이 참 생경하다. 다만 이즈음부터 애로사항이 시작된다. 혼자 하는 장거리 훈련의 가장 큰 문제, 바로 급수다. 누군가는 의아할지도 모른다. 발에 차이듯 널린 게 편의점인데 잠깐 들르면 되지 않느냐고.

러너 입장에서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마라토너에게 급수란 시원하게 한잔 들이켜는 것과 거리가 멀다. 목을 축이는, 특히 레이스 초반이라면 입을 행구는 것에 가깝다. 쉴 틈 없이 바로 달려야 하기에 잘못하면 탈이 나고, 무엇보다 겨우 유지해 오던 페이스와 호흡이 깨져버린다. 그럼에도 뛰러 나왔단 건 믿을 구석이 있어서다.


서울을 달리는 러너에게는 세계 최고의 복지가 둘 있으니, 하나는 한강이요, 또 다른 하나는 아리수다. 어디서 출발하든 조금만 가면 한강이 나온다는 것, 강을 낀 평평한 주로 위에 멀지 않은 간격으로 마실 수 있는 물이 있다는 것, 러너에게는 북유럽 부럽지 않은 최고의 복지다.

이번 훈련도 (내 맘대로) 공식 스폰서로 아리수가 함께 한다. 10km 지점에서 한 번, 20km 조금 못 가 또 한 번, 이후로는 보이는 족족 빠르게 한 모금 축인 뒤 다시 러닝을 이어간다. 어느덧 반환점을 지나 30km 지점에 들어선다. 이제 딱 5km만 뛰면 이 지긋지긋한 뜀박질도, 4개월간의 훈련도 끝이다.

물론 몸은 이미 만신창이다. 한 발 디딜 때마다 장딴지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하지만 도저히 못 하겠다 싶을 때마다 아리수가 빼꼼히 고개 내민다. 그럼 다시 한 모금 들이켜며 힘을 내본다. 그렇게 마지막 3km, 2km, 1km, 피니쉬. 머릿속에서 알람이 울린다.

"2023 암스테르담 마라톤 대비 훈련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시는 풀코스 마라톤을 못 할 거라 생각했다. 팬데믹을 겪으며 달리기의 열정을 잃어버렸고, 10km도 헉헉대는 내가 싫어 더 외면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며칠 뒤, 멈춘 줄 알았던 새로운 도전과 직면한다. 여름부터 함께 준비한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그 얼굴 중에는 아리수도 있다. 지난여름, 열대야를 뚫고 달리는 우리에게 아리수는 말 그대로 생명수였다. 조금만 뛰어도 '엘리멘탈'의 웨이드가 됐지만 멀리 보이는 아리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짤 이유가 되어줬다. 덕분에 동요와 좌절 없이 안정감 속에 여기까지 왔다.

ⓒshutterstock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여러 단어를 썼다 지우며 스스로 자주 묻곤 한다. 살아남은 몇몇 단어 중에는 ‘안정감’도 있다. 아리수가 지난여름 내내 안겨준 그 든든함이다.

살다 보면 슬럼프의 순간은 필연 찾아온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운 건 확고한 동기부여나 강한 의지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언제든 같은 자리에서 날 기다리는, 그리고 어느 때든 나를 품어줄 그들의 존재가 가장 든든한 동력이 되어줬다.

ⓒshutterstock


요즘 자주 다짐한다. 그런 사람이 되어 보자고. 함께 있을 때, 함께 일할 때, 심지어 떨어져 있더라도 안정감을 주는 사람. 동시에 그런 이들을 가능한 한 많이 곁에 두고 싶다. 그렇게 안정감으로 일상을 빼곡히 채우고 싶다.

예전이라면 자극 없는 삶이라 코웃음 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래 사랑하고 진득이 껴안는 삶, 불에 타는 장작보다 뜨끈한 전기장판 같은 사랑, 지금 내가 정의하는 행복은 그런 안정감과 맞닿아 있다. 8년간 계속된 달리기, 그리고 마라톤 도전 또한 아리수라는 안정감 속에 위태로운 여정을 이어간다.


김상민

낮에는 브랜드 마케터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쓴다.
글을 쓰다 막히면 러닝화를 꺼내 든다.
주로 늦은 밤에 성수동과 중랑천 일대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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