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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50살! 바나나맛 우유

2023.10.12


내년이면 50살! 바나나맛 우유

어렸을 때, 목욕탕을 나서는 고사리 손엔 바나나맛 우유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습니다. 왠지 발음도 바나나 우유가 아닌, 빠나나 우유라고 해야만 할 것 같은 동그랗고 샛노란 단지. 덜 마른 머리와 뽀얘진 얼굴, 아직 식지 않은 몸의 열기가 폭폭 나는 겨울철 골목길에서 바나나맛 우유를 쪽쪽 빨고 있노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바나나맛 우유는 귀찮은 목욕을, 엄마의 거침없는 때밀이를 견뎌낸 어린이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이었거든요.


글│전민지

이 기억은 저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었나 봐요. 한때 빙그레 신입사원 면접에서 “어릴 적 부모님과 목욕탕을….”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무조건 탈락한다는 소문이 있었거든요. 진짜인지 그냥 우스개소리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바나나 우유는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나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년이면 바나나맛 우유가 쉰 살을 맞이합니다. 1974년생. 한창 우리나라가 잘 살아보자 으쌰으쌰 노력하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지금이야 지천에 깔려 있지만, 그때만 해도 바나나는 금싸라기 과일이었습니다. 국내 농가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수입 금지 품목으로 지정, 미군 분대를 통해서만 겨우 먹을 수 있었거든요. 돈이 많아도 쉽게 구할 수 없었죠.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낙농업을 장려하고 있었어요. 이때 우유 사업에 뛰어든 회사가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대일유업이었습니다. 대일유업은 빙그레의 전신으로, 월남전 때 미군에게 냉동 유제품을 공급하던 회사였습니다. 미국의 퍼모스트사와 기술 제휴를 맺고 공장을 설립해 국내에 우유를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우유는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여파로 여전히 먹고 살기도 빠듯한 국민들에게 우유는 사치였어요. 냉장고가 없어 미지근하면 비린 맛이 나는 우유를 보관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고, 유당불내증도 우유를 소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고요.

베트남에서 미군을 상대로 우유를 팔았던 대일유업은 다른 기업들과 우유를 보는 시각이 조금 달랐습니다. ‘우유가 맛이 없어? 그러면 맛을 첨가해볼까?’ 고급 수입 과일 바나나를 넣기로 한 거예요. 바나나 한 송이가 사과나무 한 그루와 맞먹었다는 말도 있어요. 그토록 비싸고 맛있는 선망의 과일을 우유에 넣는다는 발상으로, 가공유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어요. 그렇게 바나나맛 우유는 딸기 우유, 초코 우유와 함께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등장부터 센세이션했던 바나나맛 우유는 패키지도 남달랐어요. 유리병이나 비닐포리팩에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바나나맛 우유는 이를 따르지 않았죠. 대일유업現 빙그레은 도자기 박람회에서 달 항아리 모양을 보고 단지 모양 디자인을 떠올렸다고 해요.

단지 모양 패키지는 한 번에 모양을 사출할 수 없어 위아래를 따로 제작한 뒤에 고속으로 회전시켜 발생하는 마찰열로 접합해야 하는데, 이 기술을 국내에서 구현할 수 없어 독일에서 기계를 수입해오기까지 했다고 해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바나나맛 우유만의 특별한 모양새를 완성한 거죠. 그렇게 바나나맛 우유는 고급 과일 바나나를 넣은, 고급 패키지 단지에 담겨 50년 간 우리의 일상에 녹아 들었습니다.

출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바나나맛 우유. 변함없는 맛과 모양 덕분에 오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건데요. 실은 바나나맛 우유의 맛이 바뀔 뻔한 적이 있답니다.

바나나맛 우유에는 실제로 바나나가 들어가지 않았어요. 바닐라향과 바나나향을 혼합해 바나나맛을 냈던 건데요. 출시 후 36년이 지난 2010년 〈축산물 가공품 표시 기준〉이 개정되면서 실제 바나나가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게 된 거예요. 바나나맛 우유 입장에서는 ‘바나나맛 우유’가 되느냐, ‘바나나향 우유’가 되느냐의 갈림길에 서게 된 거죠. 바나나 과즙을 넣었을 때 본래의 맛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고, 빙그레는 엄청난 연구 끝에 바나나 농축과즙 0.315%에 실제 바나나 과즙 1%를 섞어 맛의 변화 없이 바나나맛 우유라는 이름을 사수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처럼 50여 년간 변하지 않은 맛과 디자인, 모양은 빙그레 바나나맛 우유의 시그니처로 각인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바나나맛 우유의 브랜드 이미지는 노후화되었습니다. 매출도 저조해지기 시작했고요. 어렸을 적, 옛날에, 오래 전에…. 이런 단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거죠. 바나나맛 우유는 오히려 이를 역으로 이용했어요. 오래된 브랜드만이 안겨줄 수 있는 키워드 ‘추억’을 선택했어요.

밀레니엄이나 Y2K와 같이 미래지향적인 이미지가 인기를 끌던 1990년대말, 오히려 바나나맛 우유는 매출 신장을 이끌어냅니다. 1997년 IMF의 영향으로 알뜰살뜰 아끼던 국민들의 소비 패턴에 맞춰 4개 묶음을 어필했고, 바나나맛 우유를 먹고 자란 아이들이 자라 드라마와 영화에서 바나나맛 우유를 따스함, 추억, 그리움 등을 연출하는 소품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죠. 1998년 300억 대였던 매출은 2001년 600억 대로 성장했다고 해요.

이후 바나나맛 우유는 젊은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위한 여러 활동을 펼칩니다. 각종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고, 플래그십 스토어 ‘옐로우 카페’를 여는 등 통통 튀는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었죠. 2017년에 선보인 하트와 링거줄 모양의 빨대나 대형 빨대 등 재미있는 아이디어의 MD 굿즈는 젊은 소비자들의 이목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어요. 2020년 빙그레 공식 SNS에 갑자기 등장한 캐릭터 빙그레우스도, 남다른 마케팅을 선보이는 빙그레와 바나나맛 우유의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해요.

국내에서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죠. 하루 평균 80만 개, 1초에 9개가량이 팔리는 독보적인 가공유 1위. 지금까지 팔린 제품을 일렬로 쭉 늘어 세우면 지구를 17바퀴나 돌 수 있다고 하죠.

국내 가공유 시장 1위 바나나맛 우유는 이제 해외로 나아갑니다. 외국 여행객들 사이에서 바나나맛 우유는 ‘한국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으로 꼽히고 있고, 일본과 미국, 중국 등 10여 개국에 수출하고 있어요. 변질을 막기 위해 항아리 단지 모양 대신 멸균팩에 담았지만, 패키지에 항아리 단지 용기를 그려 한국의 오리지널 바나나맛 우유라는 걸 알려주고 있어요.

더구나 중국에서는 항아리 용기 그대로 고급 백화점에서 판매된다고 해요. 태생부터 프리미엄 우유였으니, 해외에서도 그 정도 대접은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어요? 2018년 바나나맛 우유 하나만으로 260억 매출을 올린 효자 상품이기도 하니까요.

49년의 세월 덕분만은 아닐 거예요. 문제를 해결하는 남다른 시각, 새로움을 제시하는 독특한 아이디어, 위기를 타파하는 힘찬 추진력 같은 것들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무엇보다도 바나나맛 우유가 오랜 시간 사랑받을 수 있던 이유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따스한 추억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브랜드 철학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사람 나이 50살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해요. 하늘의 명을 깨닫는 나이라는 뜻이죠. 내년이면 쉰 살이 되는 바나나맛 우유. 어떤 행보로 우리에게 또다른 즐거움을 줄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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